테르모필레 전투와 레오니다스 왕
콩콩 콩사마 수학스쿨2의 팀원 중 2분에게 큰경사가 있었답니다.
그래서 콩콩 콩사마 수학스쿨2 출판이 좀 늦어졌는데
2분에게 ‘축하 무한대’를 드립니다.
이제 전원 복귀하여 책 만드는 데 전념하게 되었구여
모두 타이트한 일정을 소화하고 있답니다.
서점에 나오는 시기는 약간 차이가 날 것 같구여
이번엔 2,3이 한꺼번에 2권 나오게 됩니다.

레온 왕자는 피타고라스를 올림픽에 초대했다.(클릭)
구전하던 시대(대화로 지식을 전달하는 시대)이니 만큼 대화하면서
지식을 전달 받았을 것이다
레온은 프리우스의 왕자였다.(프리우스Phlius는 코린토스 남쪽에 있는 도시국가)
레온은 '사자'라는 뜻이다.
그 당시 가장 강력한 도시국가였던 스파르타에도 이와 비슷한 이름을 가진 레오니다스 왕이 있었다
레오니다스는 '사자의 아들'이라는 뜻이다
B C 488년 레오니다스1세라는 이름으로 왕위에 오르게 되면서 레오니다스 왕으로 불리우게 되었을 것이다.
레오니다스 왕의 어린 시절에 대한 것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고 한다
여기서 레오니다스 왕에 대한 역사적인 기록을 살펴보면,
아길라드 왕조 출신의 제17대 스파르타 국왕이자 헤라클레스의 후예로 추앙받던 아낙산드리다스 2세의 아들 가운데 한 사람이다 라고 나와 있다.
헤라클레스의 후예라면 그리스에선 굉장한 혈통인 것이다.
왕이 그런 혈통을 가진 스파르타이기에
그리스의 연합군이 전쟁을 할 때에는 스파르타 왕이 총 지휘관이 되는 건 당시 모든 도시 국가들이 정통성을 인정하였다.
레오니다스 왕은 B C 480년 8월 테르모필레 전투에서 죽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그리스는 물론 온 세계 사람들은 그를 잊지 못하고 있다.
기념비는 물론 "300"이라는 제목의 영화로 만들어져 감동을 주고 있다.
레오니다스 왕의 테르모필레 전투가 왜 세계인에게 잊지 못할, 게다가 뭉쿨한 감동까지 주는 것일까?
그날의 피를 말리는 전투 속으로 들어가 보자.
스파르타엔 왕이 2 있었다
전쟁이 나면 둘 중 한 왕은 전쟁에 나가고, 다른 한 왕은 자리를 지켰다
만약에 이렇게 자리를 지키는 왕이 없다면,
시민보다 몇 배나 많은 노예들이 가만있지 않았을 테니까 그런 배경으로 레오니다스 왕은 페르시아와의 전투에 나가게 된다.
그럼 이제 부터 페르시아는 어떤 각오와 준비 얼마나 큰 규모로 그리스에 진격했는지 알아보자
다리우스 왕이 죽고, 그 아들 크세르크세스 왕이 3 년간 치밀하게 준비한 대 규모 병력,
함선1200 여척과 전투부대 총병력 260만 여명을 이끌고 헬로스폰토스 선교를 출발
그리스 침략에 나섰다.
여기에 비해 그리스군의 규모는 (테르모필레 전투에 이어 벌어질 살라미스 전투에서 그리스군의 함선은 총 380척이었다) 페르시아 군에 비할 바가 못 되었다.
페르시아 군대의 행렬이 얼마나 길었던지 강 하나를 건너는 데 7일이 걸리고,
군대가 숙박하는 곳의 대 하천이 군대의 식수로 쓰여 다 말라버릴 정도였다고 한다.
이 처럼, 그 유례없는 규모에 놀라 페르시아 군대가 지나는 곳 마다
아예 페르시아에 빌붙어 협조하는 그리스의 도시국가가 늘어 갔다.
페르시아는 기병이 강했기 때문에 해로 보다는 육로를 택했다.
육로로 오는 데 길목이 되는 테살리아와 마케도니아는 아예 친 페르시아로 변해
군사들의 식량 조달과 군대 조력은 물론 그리스 침략의 길안내까지 도맡았다.
물론 페르시아군의 전진 길목에 있는 도시국가들이 모두 테살리아나 마케도니아 처럼 친 페르시아로 변한 건 아니었다.
끝까지 저항한 도시국가도 있었다.
그 국가들은 페르시아군이 들어와 모든 건물을 파괴하고 수확할 수 있는 곡식들은 불태워 앙상한 폐허로 만들어 버렸다.
시민들은 미리 다른 곳으로 피신시켜놓았지만
운이 없어 페르시아군에 잡히면 처절한 보복을 받고 죽임을 당했으며 쓸만한 사람은 노예로 팔기 위해 끌고 갔다.
그리하여 무서워 벌벌 떠는 그리스 군은 페르시아군을 맞상대할 엄두를 못내고 피하는 바람에거의 전투도 없이 그리스 깊숙이 들어 왔다
그러나 스파르타의 레오니다스 왕은 달랐다.
왕은 우선 자식이 있는 병사 중 체력이 튼튼한 이를 300명 선발했다.
자식이 있는 병사를 택한 건 그 당시는 혈족 사회였기 때문에 가문을 이어갈 아들을 남겨놓는 게 중요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번 전쟁이 얼마나 그리스에 중요하며 또 얼마나 힘들고 위험한 전쟁인지 다시 한 번
강조하며 죽음을 각오해야함을 인식시켰다.
그래서 스파르타의 병사들은 너도 나도 긴 머리를 감고 빗질을 하였고,
마침 이때 페르시아의 척후병이 몰래 그 장면을 목격하고 왕에게 보고하였다.
스파르타군이 이 위중한 때에 한가하게 머리 감고 빗질이나 하며 멋을 부리고 있는 걸 보니
소문과는 다르게 별 볼일 없는 것 같다고
그러나 그것은 페르시아 군이 스파르타 군의 풍습을 몰라서 하는 말이었다.
스파르타 군은 전쟁이 났을 때,
그 전쟁에서 목숨을 바쳐야한다는 결심을 할 때,
긴 머리를 감고 정성껏 빗질하는 것으로 전쟁 준비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테르모필레 협곡에서 스파르타의 레오니다스 왕이 이끄는 300명의 군대는 협곡의 이점을 이용해 대규모지만 그 위력을 발휘할 수 없는 병목현상을 일으키는 지점에서 협곡으로 들어오는 페르시아 군을 족족 물리치고 큰 승리를 거두었다.
이제서야 드디어 페르시아 군은 마라 톤 전투에서 패배했던 것을 떠올리며 그리스 군에 대해 두려움을 느끼게 되었다.
그러나 페르시아에 협조하는 그리스인에 의해 협곡을 돌아 오는 다른 길이 알려지게 되고
죽음을 각오하고 처절하게 싸우던 레오니다스 왕과 부대원 300 명이 전멸했다고 전해졌다.
나중에 밝혀진 바로는 300명 중 병이 나서 치료를 위해 전쟁터를 벗어난 2명만이 살아남았고
그 2의 이름은 아리스토데모스와 판티테스였다고 역사의 기록은 전한다.
그리스인들은 겁이 나서 눈도 마주치지 못했던 페르시아 군을 물리치고 목숨을 바친 스파르타의 레오니다스 왕이 너무나 자랑스러웠을 것이다.
더구나 300명이 그리스를 지키기 위해 그 많은 적군을 상대했다니 감동에 목이 메었을 것이다.
그리고는 페르시아 군과 싸우는 용기를 내게 되었을 것이다.
그 얼마 후 벌어진 살라미스 전투에서 페르시아 군을 상대로 그리스는 대승을 거두게 된다.
레오니다스 왕의 행적은 그리스인들을 감동 시켰고 그를 잊지 못하게 했다.
시인 시모니데스(Simonides BC 556∼BC 468)는 비석에
다음과 같은 시를 썼다
“나그네여, 가서 라케다이몬(스파르타)사람들에게 전해주오. 우리들은 명을 받들어 여기서 잠들었노라고…….
B C440년 스파르타인은 레오니다스 왕의 유골을 테르모필레에서 스파르타로 옮겨 배장하고
그 묘소 위에 기념비를 세웠으며 여기에 300인의 이름을 새겼다.
현재 그 언덕위에 레오니다스를 기념하는 석조 사자상이 서있다
(레오니다스가 사자의 아들이라는 뜻이므로 사자상은 레오니다스를 상징한다)
그리스인들은 레오니다스 왕과 300인을 영원히 그리워한다.
그리고 세계인들까지도 .....
# by | 2009/11/20 13:42 | 콩콩콩사마수학스쿨 | 트랙백 | 덧글(3)











